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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09 가위가 2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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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1-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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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가 2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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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31:10~11)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을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12:4)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 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19)

 

사람의 취미에 따라 세계 각국의 우표를 수집하거나, 동전(coin)을 수집하는 일들을 흔히 본다. 이는 서민들의 취미라면 재벌 중에는 취미에 앞서 재산 축적의 방법으로 세계적인 명화(名畵)를 수집하는 이가 있고, 희귀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이도 있다. 우표도, 동전도 아닌 세계 각국의 가위를 200여개 수집한 이가 있다면 아마도 고개를 기우뚱 하리라.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정일형(鄭一亨)박사가 1936년 미국에서 두루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후 감리교 신학대학과 연세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일경(日警)은 한국 지식인을 감시하되 특히 미국 유학한 이를 감시하던 중 정 박사가 항일 운동을 한다는 구실로 그를 투옥하였다. 그의 아내인 이 태영(한국 최초의 여변호사) 여사는 당시 평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첫째는 교사직을 가지고 있으면 남편의 옥바라지할 시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둘째는 교사의 월급만으로는 식구들의 생활을 돌보기에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평양에서는 누비이불 생산이 유행하였는데 오늘과 같이 기업에서대규모로 생산함이 아니라 가내공업에 불과하며, 가정에 재봉틀을 한두 대를 들여놓고 완성된 이불을 옷가게에 넘기거나 친히 팔러 다녀야 했다. 이 여사는 교사를 사면하자 곧 누비이불 만드는 일에 뛰어 들어 남편의 면회와 식구들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기우렷다. 정일형 박사가 만기로 출옥하던 날, 반가워 부인의 손을 잡다가 깜짝 놀랐다. 이 태영 여사의 엄지손가락이 거의 90도루 휘어졌고, 검지와 중지도 휘어져 있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이어 제2차 대전을 일으킨 후 무기 생산으로 쇠붙이란 모두 거두어 드린지라 가위 하나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여사가 재봉틀 실을 끊으려고 해도 가위가 없으니 손으로 그 질긴 실을 끊다보니 손가락이 휘어진 것이다. 정일형 박사가 해방 후 유엔총회의 대표단 고문으로, 제2~9대 국회의원으로, 외무부 장관으로 외국에 자주 나가게 되었다. 그가 외국에 나갈 때 마다 아무리 분주하고 피곤해도 꼭 한 가지 잊지 않는 것은 아내가 그렇게도 가지고 싶어 하던 가위를 사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가위 수집가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가위가 200개가 넘게 되었다. 이들 가정에서 아내는 고난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하셨다. 이를 새 번역 성경에는 <누가 유능한 아내를 맞겠느냐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가난을 모르고 산다> 하셨다. 한편 남편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표시하였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조금만 힘들어도 나누기를 생각하는 오늘의 지성인들에게 좋은 교훈이라 하겠다. 10/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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