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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0 성장을 멈춘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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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1-1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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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을 멈춘 교인 >       
                                                                             이익관 목사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리스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지난 7일 주일에 잠깐 봉사한바 있는 산타마리아 교회에서 임직식이 있어 참석하였다. 임직식후 돌아오면서 느낀 일로, 나 자신이 운전할 때는 운전에 신경을 쓰느라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으나 동행하신 목사님이 운전하시므로 앞좌석에 앉아 가을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산타마리아에서 L. A 로 오는 길에는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산타바바라에서부터는 차가 넘치기 시작하여 L.A.에 도착하기까지 4차선 에 꽉 차서 제 속력을 낼 수가 없으니 좌우를 살필 수 있다. 앞과 옆에 달리는 차를 보면 토요다, 혼다, 닛산, 마쯔다 등 일제차로 미제 차와의 대비는 20:1 정도로 느꼈으며, 어쩌다 가문에 콩 나듯 포드나 GM이 보이나 고물이 다된 초라한 차들뿐이다. 일본차가 70년대에 FWY를 달리고 있으면, 달리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일제차의 모습이 초라하였다.

   30년이 지난 오늘, 무엇이 오늘의 모습으로 바꾸었을까. 미국은 일본을 얕잡아 보고 자만에 빠져 안주하며 새로운 도전이 전무한 반면, 일본은 꾸준히 노력하고 연구하여 성능과 안전에 대한 대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전진이 없고 새로운 도전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뒤처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달리는 차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도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둔감한 자는 언제는 뒤처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한 분 목사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수 있는 인재를 찾다가 한 소녀를 눈여겨보았다. 목사가 그를 교사로 임명하기 전에 갖추어야할 순서가 있었다. 이는 소녀의 부모는 아직 미신자(未信子)라 교사로 봉사하면 교회에 모이는 시간이 많아지므로 부모의 양해를 얻고자 그의 아버지를 방문하였다. 아버지 되는 이와 인사를 나누고 온 목적은 댁의 따님을 저희 교회의 일요학교(일본을 주일학교를 일요학교라 함) 교사를 임명하려는데 부모님의 양해를 구하려 왔노라 하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다가 하는 말 “선생(일본은 목사를 선생이라 주로 부른다) 내 딸을 교사로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생각하기를 자기 딸을 교회 교사로 임명하겠다면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안 된다고 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오랜 침묵 후에 “적어도 교사라면, 더욱이 교회에서 어린이를 가르친다면 인격적으로 본이 되어야 하는데 내 딸은 그렇지를 못하니 허락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뜻밖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소녀의 아버지의 말은 “남을 가르치려면 집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형제들과는 화목하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데 내 딸은 그렇지를 못하니 남을 가르칠 인격이 못됩니다.” 목사는 그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작가 미우라(三浦)는 오늘의 교인들은 예배드린 후 집에 와서 교회 갔던 옷과 함께 예수도 오시이레에 넣고 만다는 말이 생각난다. 교회 출석은 하나 새로운 변화, 새로운 도전이 없는 이의 모습을 엿보는 듯하다.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9요3:3)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이 그립기만 하다.
1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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