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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1 고마우신 분들(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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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12-29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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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우신 분들(II) > 
                                                                            이익관 목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시107:1~3)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합이로다. (시107:25)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7)

1907년 처음으로 장로회 신학교 졸업생 일곱 명을 배출한 평양신학교는 그 후 박형룡, 주기철, 손양원, 김익두, 최봉석 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력의 목사를 배출하였습니다. 한편 평양 신학교는 반세기(世紀)동안 두 번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먼저는 왜정 말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면서 자진 학교 문을 닫았습니다. 평양신학교가 해방 후 1945년 다시 문을 열었으나 1950년 공산당에 의하여 강제로 기독교연맹 신학교로 개편하자 역사적 평양신학교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는 폐교되고, 기독교연맹 신학교가 되자 많은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였습니다. 나 역시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등교를 포기하였습니다. 6.25 전란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월남하여 51년도 5월 총회신학교 전신인 장로회 신학교 졸업장을 들 수 있었습니다. 졸업장을 손에 든 나에게 누구 한 사람 축하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은 제주도 표선에 피난 중에 있었고, 내가 섬기던 고향 교회 교우들은 대부분 대구에 머물러 있으니 누구 한 사람 축하할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 갈 곳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는지라, 졸업식이 있었던 부산진교회당 구름다리에 멍하니 혼자 서 있었습니다. 누가‘졸업을 축하 합니다’라는 말이 들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10대 중반의 소년이 서 있습니다. 그곳에는 나 밖에 없는지라 그에게‘누구지’하였더니 내 처남의 이름을 대며 그의 친구인 노 아무개랍니다. 오늘 여기 왔다가 내가 졸업하는 것을 알았다며 자그마한 신약성경책을 졸업선물로 손에 들려줍니다. 그는 어린나이에 홀로 피난 나와 친구들과 합숙하며 구두 닦기를 하며 자취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추측컨대 졸업식에 사람들이 모이니 구두 닦기를 하러 왔다가 나를 본 것 같습니다. 내게 졸업선물을 준 단 한사람인 그를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어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못하였으니 주님 탄식하신 <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하신 그 아홉 중의 한 사람이 또 끼였습니다. 다음 고마운 이는 전남 임곡이라는 면 소재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광주 가려고 역에 나가다 역전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는 장 집사를 만났습니다. 그가“목사님 광주 나가시면 책이나 한 권 사보시지요”당시 돈 300환을 들려주십니다. 부자에게는 점심 값도 안 되는 돈이지만 시골 이발소인 그에게는 그날의 수입의 전부일 것입니다. 광주 책방에서 무슨 책을 살까 살피다가‘목회학(牧會學)’이라는 책이 있어 구입하였습니다. 그 책은 목회학 교과서라 목회 초년생인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서울로 올라간 후에 그가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역시 고마운 이에게 단 한 번 고맙다는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 역시 열 명중의 아홉에 해당되는 축에 드는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90 평생에 내게 사랑과 은혜를 베푼 이가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만은, 감사의 달을 맞으면서 그들에게 단 한 번도 감사함을 전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11/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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