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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4 무명의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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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대명
작성일 14-01-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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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전도자>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29-34)   
     보스턴 구두가가의 한 젊은 점원에게 복음을 전한 이름 없는 전도자가 후일 전도 받은 젊은 점원이 19세기 미국을 크게 부흥케 한 무디(Moody)가 되리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다. 기독교역사에는 때로는 이름 없는 한 전도자가 기독교 역사에 큰 인물을 배출케 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오순절이라는 1907년대 부흥을 일으킨 주역인 길선주 목사를 전도한 무명의 전도자가 있음을 기억하는 이도 없다. 어느 날 길선주에게 선도(仙道)를 함께 닦던 도우(道友)인 김종섭이 선주를 찾아왔다. “이보게 선주, 내가 야소교의 도리를 알고 보니 이제 까지 닦던 선도가 얼마나 허망한 가를 깨달았네. 자네도 야소교에 입교함이 어떤가?” 그러며 그리스도 신문 한 장을 들려준다. 이는 당시 전도용 회보(回報)였다. 이제까지 선도를 닦던 선주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며칠 후 종섭은 다시 이선생전(李先生傳)이라는 책자를 선주 앞에 놓고 갔다. 이선생전이란 중국에 아편 중독자가 예수 믿고 새사람 되였다는 이야기다. 다음 날 찾아온 종섭에게 선주는 “이 사람 나는 아편쟁이가 아닐세.” 냉소하며 책자를 돌려주었다. 종섭은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방문하며 선주가 회심하기를 기다렸다. 이선생전을 돌려받은 종섭은 다음은 장원양우상론(張元兩友相論)이라는 책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이 책은 장 씨와 원 씨라는 두 친구가 기독교 진리에 대한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친구의 간곡한 권에 못 이겨 장원양우상론을 읽는 중 조금은 마음이 열리나 그렇다고 여러 해 닦아온 선도를 버릴 수는 없다.
    친구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종섭은 마침 기일(寄一)선교사가 번역 출판한 천로역정을 선주에게 들려주며 읽어 보라고 권하였다. 종섭은 도우이며 허물없이 자란 친구가 자기를 위하여 그렇게 애쓰는 것이 고마워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로역정을 일기 시작하였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으로 가는 중 십자가 앞에 이르렀을 때 죄 짐이 벗겨지고, 천성에 이르는 것을 읽고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다시 찾아온 종섭에게 “이 보게 종섭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줌세.“ 그 때 둘은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후 예수 믿기로 작정한 선주는 29세 때인 1897년 8월15일 선교사 이 길함(李吉咸)에게 판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한문에 능한 그는 한약방을 경영하여 한 달에 80원의 수입이 있었으나 선교사의 권유에 의하여 한 달에 6원을 받는 전도사의 일을 시작하였다. 이름 없는 한 전도자의 열매인 길선주로 끝인 것이 아니라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인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공헌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길 목사의 생전 설교 수는 2만 번, 그의 전도로 목사 된 이 41명, 길 목사의 설교들 들은 이는 5백만 명, 세례 받은 자 3,000여명, 설립교회 600여 곳이라니 무명의 전도자의 열매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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