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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4 승동(僧洞)과 승동교회(勝洞敎會-엘림여성중창단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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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대명
작성일 14-03-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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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僧洞)과 승동교회(勝洞敎會-엘림여성중창단을 맞으며)> 
                                                                         

백성으로 더불어 의론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의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암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 살육하였더라. (대하20:21-23)

     어제는 한국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서울 승동교회의 엘림 여성중창단이 우리 대흥교회의 헵시바와의 조인트 콘서트가 있어 많은 은혜로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승동교회 엘림여성중창단을 맞이하며 승동(僧洞)이 승동(勝洞)교회가 된 역사를 생각하는 것도 뜻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먼저 승동(僧洞)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양대군이 조카인 제6대 단종을 상위로 삼고, 후에는 노산군(魯山君)으로 감봉(降封)시켜 강원도 영월로 추방하였다가 죽게 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이 조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비록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찬탈이란 죄책감에서 오는 고뇌와 난치병으로 하루도 영과 육이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세조는 혹시나 마음의 평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1465년 현재의 파고다 공원 주변 민가(民家) 2백여 호를 강제로 헐고 10층 석탑과 함께 청기와 8만장을 드려 1464년 법당을 세운 것이 원각사(圓覺寺)입니다. 그 후 사람들은 원각사를 중심으로 승려들이 우굴 거리자 사람들이 중들의 마을이라 하여 승동(僧洞)이라 불렀습니다.
   승동교회는 1893년 설립한 곤당골 교회와 홍문석교회가 연합하여 1898년에 중앙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1907년 평양에서 오순절 역사가 일어났을 때 그 은혜를 사모하여 서울에서도 도사경회를 열기로 하고, 평양 성령강림의 주역격인 길선주 목사를 초청하여 1907년 2월17일부터 도사경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가장 큰교회는 연동교회였으나 교회의 위치가 변두리라, 중앙에 위치한 중앙교회에서 도사경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길진경 목사(길선주의 장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 집회는 중앙교회에서 열렸는데, 성령의 강한 불이 몰아쳐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길선주는 중앙교회는 그리스도가 승리한 승동(僧洞)의 복음의 등대‘라면서 그 이름을 이길 승(勝)자를 넣어 중앙교회에서 승동교회로 바꿔주어 이제 승동교회는 부흥의 영원한 기념탑이 되었다.> 즉 승동교회 라는 이름은 길선주 목사에 의하여 1907년 2월 도사경회 중에 지어주어 중앙교회가 승동교회가 된 것입니다.
   지금으로 100여 년 전 길선주 목사는 앞을 예견하시는 듯, 한국 교회가 세속화하며 좌경화 할 때 보수 신앙의 본거지요 상징인 승동교회라 이름 한 것은 앞날을 보는 길 목사님의 예견이라 하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서울 승동교회 중창단원들이 이곳까지 오셔서 좋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영원히 승리하는 승동교회가 되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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