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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4 한서 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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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대명
작성일 14-03-1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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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선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렘9:1)

     어려서 주일학교 다닐 때, 오후의 모임에 나가면 선생님이 아래 찬송가를 인도하면 모두가 흥이 나서 마르바닥을 쿵쿵 치며 열심히 부르던 생각이 난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이 동산에  한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려 가세 일하려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가세(새580장)
  이 찬송가는 남궁 억(1863-1939)선생이 작사한 것으로 선생은 일찍이 뜻한 바 있어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0개월 만에 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그 후 선교사 게일 (한국명 기일)과 함께 한영사전을 편집하는 중 그의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셨다. 선생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민족을 영육으로 깨우치기 위하여 작사한 것이다. 이 찬송가가 전국 방방곡곡 퍼지나가자 겁을 먹은 총독부는 1937년 3월 이 찬송가를 교회에서 부르지 못하게 금지령을 내려 8.15 광복까지 부르지 못하였다.
   선생은 3.1 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9월에 자신의 재산 3.900원으로 홍천 모곡에 땅을 사고 열 칸의 기와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이어서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붙이고 학생을 모집하였다. 그 후 1923년 9월에 감리교 선교의 보조금 3.000원과 홍천 유지들로부터 2.000원의 기부금으로 100여 평의 새 학교를 낙성하였다. 선생은 나라사랑 하는 길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나라꽃인 무궁화를 널리 퍼지게 함이라 생각하고 무궁화를 심기를 장려하며, 친히 무궁화 묘포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묘목을 팔아서 모곡학교 운영비로 보태어 쓴다는 것은 구실이였고, 실은 무궁화 묘목을 해마다 수십만 주 길러서 각 지방의 학교 사회자체에 팔기도 하였지만 기증하여 나라꽃 무궁화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였다.
   선생의 민족운동을 하는 것을 안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조선인 신현구라는 자가 안식교 시조 사원을 가장하고 선생을 찾아가“무궁화를 사러 왔다고 했다.” 의심할 줄 모르는 선생은 그를 무궁화 모포로 데리고 가서 ‘영구성 지닌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라오. 생명이 짧은 벚꽃(일본국화)과 비할 바 아니라.’고 하였다. 선생의 말을 듣고 간 그는 1933년11월4일 홍천경찰서 신현구 자신이 앞장서고 일본인, 조선경찰 16명이 모곡학교를 급습하여 학교 관계자들 12명 검속하였다. 이 사건  후 선생이 가꾼 7 만 주의 무궁화가 하루 아침에 재거 되었고, 심지어는 춘천에 있는 선교사 사택에 있는 무궁화까지 찍었고 무궁화가 있는 집은 불온 분자로 여기며 모두 찍어버리기 까지 만행하였다. 오늘 전국방방곡곡에 우리 나라꽃 무궁화가 퍼져 있는 것은 남궁 억 선생의 수고를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3월이라 애국선열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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