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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4 수전노(守錢奴)의 말로(末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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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대명
작성일 14-07-15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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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守錢奴)의 말로(末路)>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을 감추었느냐(행5:1-3)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 하시느니라(고후9:7)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를 근대 바이얼린 주법의 개척자라고 한다. 그는 1840년 58세를 일기로 남부 프란스 니스에서 운명하였다. 7세부터 손에 바이얼린을 든 그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연주를 부러워한 리스트는 자기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고 싶다고 까지 하였다. 그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는 리스트를 비롯하여, 쇼팽, 배를리오즈 등 파리의 신낭만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연주를 사모하는 곳곳에서 그를 초청하여 연주회를 열었고, 그는 그 때마다 적지 않은 개런티를 벌어드릴 수 있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이든 적지 않은 금화(金貨)가 뒤 따랐으나 그는 많은 수입에 비하여 사람들이 놀라리만큼 수전노의 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여유가 있음에도 늘 허름한 여인숙에 투숙하였고, 먹는 것도 보는 이가 민망하리만큼, 검소하였다. 파가니니의 이런 생활은 후일 자신이 죽은 뒤에도 사랑하는 아들 아킬레스가 애비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물려주기 위함 이였다. 파가니니의 이러한 생활한 후일에 폐결핵, 류마티즘, 인후결핵, 신경장애 등 각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1840년, 58세를 일기로 남부 프랑스 니스에서 세상을 하직할 때 그의 전 재산을 고스란히 아들 아킬레스에게 물려주면서도 교회에는 단돈 한푼 헌금한 일이 없었다.
   파가니니가 죽은 후 교회의 주교(主敎)는 그의 주검을 성화(聖化)된 교회 묘지에 묻을 수 없다고 허락하지 않아 그의 주검은 유랑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검을 처음에는 프랑스의 니스에 있는 그의 집안에 방부제로 처리하여 보관하였다. 그 후 제노바로, 마르세유로, 칸으로, 빌프랑슈 근처의 ‘문둥이의 집’으로, 또는 올리브유 공장의 시멘트 통 속으로 전전하다가 산토노라의 바위섬에 5년 만에 겨우 묻히게 되었다. 그 후 36년이란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다음 1876년에야 교회의 주교의 판결이 무효화가 되어 파르마의 공동묘지에 매장하게 되었다.
   사도시대에도 아나니아와 그 아내 삽비라와 같은 이도 있어서 땅 판 것을 일부 감추고 하나님 앞에 전부를 바치는 듯 거짓 하였을 때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 하신다> 하셨다.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따르는 이도 적지 않아, 벌어들인 돈도 적지 않았지만 모든 생활에서 인색하고, 교회에 돈 한 푼 아까워 헌금하지 못한 그의 말로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인색하여 제대로 예물을 드려 보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기고 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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