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대야/김윤희
고무대야
김윤희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내려앉자,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고국 땅에 발을 딛자 빗님이 마중 나와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비가 드문 LA의 건조함과는 달리,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창덕궁 비원을 거니는 중, 천둥과 번개를 몰고 온 장대비가 느닷없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며 빗줄기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으며 차갑게 스며드는 촉감을 오롯이 느꼈다. 뜰 옆으로 흘러드는 물이 작은 도랑을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니 오래전 고무대야 보트에 올랐던 풍경이 아련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변변한 놀이시설은 없었지만 골목 전체가 놀이터였다. 해질 무렵까지 아이들은 몸을 부딪치며 뛰놀았고 그곳에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비 오는 날의 기억이다.
우리 집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물이 들지 않았지만 바로 아래 골목은 장대비가 한 두 시간만 내려도 금세 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골목은 어느새 우리들만의 또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큰오빠는 김장철 배추를 절이던 큼직한 고무대야를 꺼내 와 나를 태웠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 속에서 대야를 끌며 골목을 헤쳐 나갔다. 나는 언니의 쪼리 슬리퍼를 양손에 쥐고 노처럼 저었다. 둥둥 떠 있던 그 순간만큼은 어느 호화 유람선도 부럽지 않았다.
고무대야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균형을 조금만 잃어도 금세 뒤집혔고, 나는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위험하게 논다며 꾸짖다가도 이내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마른 수건으로 감싸주셨다.
장마가 지나면 어김없이 방역차가 나타났다. 붕붕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골목마다 하얀 연기를 토해냈다.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는 희뿌연 연기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녔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웃음은 허공을 타고 메아리처럼 번져갔다. 안개에 잠긴 듯한 그 세상은 꿈결처럼 몽롱했다.
지금 그 골목은 카페와 공용주차장으로 변했다. 더 이상 물이 차오를 염려도, 대야를 띄울 자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젖은 옷깃의 물비린내, 희뿌연 연기 속에서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 젖은 몸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길까지, 이 모든 것들은 유년의 한켠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삶은 때때로 물살에 흔들리는 고무대야처럼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출렁임 속에서 나는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간다. 흔들림은 어쩌면 나를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러 쌓인 시간들은 기억이 되어 마음의 온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으로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내린다. 창가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머물렀던 시간을 반추해 본다. 빗속의 고국 풍경이 잔잔히 내 안으로 스며들고 오래된 기억이 새 물결처럼 일렁인다.
비는 나에게 귀향의 징표이자 추억을 적셔 다시 채워주는 선물이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그때의 어린 소녀로 돌아간다.
고무대야가 뒤집혀 흙탕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처럼, 오늘도 나는 내 삶의 물결 속에서 천천히 중심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