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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국 원로목사

2017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종교개혁 500주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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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7-10-0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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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종교개혁 500주년 칼럼) 

권영국 목사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5개의 반박문을 붙임으로 로마 캐톨릭(천주교)으로부터 정식으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고, 올 해가 그 500주년이 되는 해가 됩니다. 루터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영적 싸움을 통해 정통주의 개신교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루터의 성격은 매우 급하고 선동적인 어투를 사용하는 전형적인 개혁자였습니다. 반면에 그를 이은 2세대 종교개혁 바톤은 멜랑크톤에게 이어졌습니다.  멜랑크톤은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피하는 차분한 사람이었기에, 루터가 죽은 후에 멜랑크톤은 온건한 개혁정책을 펼쳤습니다.  칼빈주의자들과도 부딪히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고, 심지어 로마 카톨릭 교회와도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교내의 강경파 사람들은 멜랑크톤이 루터를 배반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루터가 그토록 반대했던 철학적 이성(理性)을 다시 교회로 끌어들여서 신앙을 설명하려고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부패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화하기 위해 성찬식이론인 “공재설”을 이나 “오직 믿음만”의 교리까지도 포기했다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이 비난 중에 멜랑크톤은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 성경에는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 구원에 필수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The peripheral,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 두 개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즉 본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훗날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분류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자주 사용하기도 하였고, 오늘날도 신학적 토론 때마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신학자는 4세기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4천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고 신학과 신앙을 확립한 거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서 본질과 비본질 간의 문제를 놓고 심도있게 다루었습니다. 특별히 목숨을 내주어도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동서 교회가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다툴때에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고집을 버리고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훗날 17세기 멜데니우스가 선언하였고 리처드 백스터에 의해 널리 알려진 기독교 격언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와 영국의 존 웨슬리는 구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서로를 존중했고 사랑했으며, 서로의 글들을 읽기를 즐거워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칭찬해주었습니다. 
   미국의 에이든 토저(영국의 웨슬리 입장과 유사)와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미국의 에드워드 입장과 유사)도 구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루는 토저와 로이드 존스가 한 자리에서 대화하며, 로이드 존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토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로이드 존스는 토저의 설명에 한 마디의 반증도 하지 않았고 대신 그를 향해 빙그레 웃음 지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정중하게 사양합니다”의 의미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빙그레 웃음의 여유를 가져봅시다. 
201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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