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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09 이 찬영 장로(1870~1950? 거지의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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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1-2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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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영 장로(1870~1950? 거지의 친구 )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한국에 있을 때 장로 고시하러 온 이들을 노회에서 면접한 일이 있었다. 어느 분의 이력서를 보니 원적(原籍)이 황해도 은률 이며 신앙경력에 영아세례라 하였다. 그에게“은률 출신이면 이찬영 장로를 아시는가?”물었다. 만일 모른다면 그는 가짜 은률 사람이다. 한참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닦더니“제 가친입니다”바로 이찬영 장로의 아들 이였다. 황해도 출신 교인이라면 이찬영 장로의 이름을 한 번쯤 들었을 것이다. 그는 봄가을로 거지를 위하여 일주간씩 잔치를 열 되 봄에는 거지들이 겨우내 입었던 옷을 벗기고 여름옷으로 갈아입혔고, 가을에는 여름내 입었던 옷 대신 검게 물들인 광목에 솜을 두툼하게 넣은 옷으로 갈아입힌 문자 그대로 거지들의 친구였다. 그러면 이찬영 장로는 어떤 분이였나.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으니 어려서는 남의 집 심부름, 장성하여서는 이집 저집으로 품 파는 가난뱅이였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 없는지라 서른 살이 이르도록 딸을 주는 이가 없어 총각으로 있다가 가난한 집 어린 처녀를 맞아 겨우 가정을 이루었다. 황해도는 일찍이 복음이 들어간 곳이라 은률에도 교회가 일찍 세워졌었다. 외롭고 힘든 찬영은 자진하여 교회에 나갔다가 십일조에 대한 말씀에 듣고 마음으로 결심한 것은 십일조 실행 이였다. 그는 먼저 십일조 주머니를 만들어 놓고 낮에 이 집, 저 집에서 품 팔아 얻은 것의 십일조는 물론,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때라 저녁이면 석유통을 등에 지고 이곳저곳으로 등유(燈油)를 팔며 얻은 것의 십일조를 주머니에 모았다 주일이면 교회에 바쳤다. 찬영은 조금씩 돈이 저축이 되면 버려진 황무지를 사서 친히 개간하기 시작하여 적지 않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생활도 안정 되었다. 상업에 눈이 뜬 그는 은률에서 포목상을 열었는데 손님들에게 자를 재도 정직하게, 값도 싸게, 그러니 사람들이 장에 오면 찬영의 포목점을 찾으니 그는 날로 부유하게 되었다. 그가 점차 경제적으로 윤택해지자 그 지방에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해마다 들어오는 소작료를 받되 십일조 주머니가 아닌 십일조 창고를 만들어 들어오는 곡식의 1/10을 창고에 넣었다가 추수감사절에 교회에 드리곤 하였다. 한국 교회 역사상 거지를 위한 잔치를 열고, 십일조 창고를 가진 이는 찬영 밖에 없으리라. 그는 십일조 드림으로 끝인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금전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 사택이 초라 하자 개인으로 사택을 지어 헌납하였고, 황해도 안악에서 김홍량과 김구가 교회 학교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침을 듣고 배우지 못함을 서럽게 생각하던 그는 개인으로 교회 내에 광선(光宣)소학교를 세워 가난한 집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하신 말씀을 실천하여 우리에게 본을 보이고 가신 분이다.03/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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