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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0 땅콩 박사(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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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1-2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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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콩 박사(I) >       
                                                                             이익관 목사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그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다(시68:5 새 표준성경)

 

 "땅콩 박사"란 흑인 식물학자 조지 워싱턴 카아버의 별명이다. 미 남부 지역의 주산물인 목화를 연작하니 땅은 메말라지고, 생산량을 줄어드는데 설상가상으로 멕시코에서 들어온 바구미가 목화밭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카아버는 농민들에게 목화 대신 땅콩을 심기를 권장하였고, 땅콩을 심다 보니 많은 땅콩을 주체하기 힘들에 되었다. 카아버는 땅콩 처리 문제 해결위한 연구 끝에 105가지의 땅콩 요리법을 만들었고, 잉크, 물감, 구두약 등 수많은 생활필수품도 발명 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땅콩 박사’라 부르게 되었다.
  카아버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가 누구인지, 정확한 생년월일도 모르는 노예의 후손이다. 그가 식물학자가 되어 동족은 물론, 미 남부의 농민에게 살 길을 열어준 뒤에는, 흑, 백을 초월하여 고아인 카아버를 돌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모세스 카아버 가정의 노예였던 어머니는 어린 카아버를 남겨둔 채 불량배에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모세스는 고아가 된 카아버를 14세 까지 자식과 같이 돌보며 기초적인 글까지 가르쳐 주었는데, 카아버는 더 배우기 위해 14세 때 모세스 집에서 나와 흑인 학교가 있는 네오쇼로 갔다. 네오쇼에 이른 카아버는 마구간 짚 속에서 하루 밤을 자고 아침에 볕을 쪼이고 앉아 있을 때, 이를 본 마리아 왓킨스 란 흑인이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자기 가정 일을 도우며 학교에 다니기를 허락하였다. 2년 후 카아버는 더 배울 것이 없자 다시 새로운 등지를 찾자 떠날 때에 마리아는 낡은 가죽 성경을 카아버 손에 들려주며 신앙생활을 잘할 것을 권하였다. 카아버가 다음 간 곳은 포드 스코트로 그 곳에서는 세탁업을 하는 흑인 루시 밑에서 일을 도우며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루시 가정도 신앙심이 깊은 가정으로 카아버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루는 카아버가 루시에게 좋은 가정을 만난 것은 운이 좋았노라 하자 루시는"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라고 깨우쳐 주어, 카아버는 이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그 후에도 백인 미술 교사 버드 여사가 아이노아 농과대학 교수로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카아버를 소개하므로 그 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식물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카아버가 알라바마 터스키기 흑인 학교 교사로 있을 때 에디슨 연구소에서 연봉 10만 불로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수입하던 물감 끊어지자 시민이 물감으로 고통 받자 식물의 열매, 줄기, 뿌리 등으로 500여 가지의 식물성 물감을 만들어 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물감 회사가 카아버 박사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금액을 기록하지 않은 수표를 보내면서 자기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하였을 때도 거절하며 물감 만드는 법을 아무 조건 없이 거저 알려 주었다. 카아버는 고아인 자기를 돌본 사회에 대하여 보답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봉사하였으며, 이 귀한 일꾼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고아를 돌봄으로서 후일 흑인 사회는 물론, 남부의 백인 농부들에게도 살길을 열어 주었다. 야고보는 <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약1:27)라고 하셨다. 
0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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