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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관 원로목사

2010 예레미야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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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1-1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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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의 눈물 >        
                                                                             이익관 목사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哭泣)하리로다(렘9:1)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가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도 주여 와서 보옵소서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한국의 현직 판사가 기록한 칼럼 집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서문에서 “내가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 언젠지 부끄럽지만 기억이 안 난다”며, 강도상해죄로 재판을 받은 한 죄수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피고는 소형 트럭에 야채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며 팔아 근근이 생활하였었다. 그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단란하게 생활하던 중 불행하게도 부인이 중병에 걸려 치료비로 생활의 기반인 트럭을 팔아야 했고,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기까지 이르렀으나 병은 차도가 없다. 참담한 현실에 부닥치자 부엌칼을 들도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고, 범죄하게 이르렀다. 택시 기사는 강도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상처를 입었고, 그를 경찰에 넘겨주었다.

   사건을 알게 된 친지들이 상해를 입은 택시 기사와 화해를 하였고, 병중에 부인은 재판장에게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도 올렸다. 판사는 피고의 사연이 딱하지만 대한민국 형법에는 상해강도죄는 초범이라도 최하가 2년 반이라, 2년 반을 선고하며 “잘 다녀오라”고 하였다. 판사인 자신이 징역을 선고하며 좌절감을 느낀 것은 차가운 법조문에 때문에 관용, 사랑, 친절 등 따뜻한 정을 베풀지 못한 현실임을 괴로웠노라 하였다. 그는 메마른 우리 사회에 진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하였다. 

   눈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산소2 와 수소1 그리고 소량의 나트륨에 불과하다. 비록 적은 양의 눈물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기쁠 때, 분하고 억울할 때, 슬플 때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귀하고 순수한 눈물은 이웃과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눈물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얘기가 떠오른다.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라 탄식하였다. 그는 왜 그렇게 슬퍼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평강의 예언을 듣고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겠고, 하나님의 선민은 포로가 되어 이국땅에서 당할 고통, 슬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민족의 죄를 용서하시라는 간곡한 중보 기도를 올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리라>(렘15:1)하셨다.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반역하는 유다민족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다는 말씀이요, 유다 백성의 구원을 거절하심이다. 예레미야는 이 슬픔을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표준 새 번역 렘9:1)이라고 탄식하였다. 

   정이 메마른 우리 세대에 이웃을 위하여 울 수 있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넘쳤으면 한다.                                                                            0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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