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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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아
작성일 25-05-17 18:09
작성일 25-05-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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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 바구니
조옥규/수필가
오랜만에 뜨개질 바구니를 꺼낸다. 요즘은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도 뻣뻣해져 의식적으로 멀리 하지만 오랫동안 곁에 두고 희노애락을 짜내려 가던 소중한 실바구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지셨을 때 굵고 실한 실 꿈을 태몽으로 꾸었다 하셨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하다가도 예쁜 실이 눈에 띄면 사 모으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렇게 모았던 실이 손녀의 아기모자 보닛(bonnet)과 케이프(cape)가 되었고, 어느 젊은 부부의 아기 겉싸개가 되기도 했다.
나는 뜨개질 전문가도 아니고 솜씨도 어설프다. 하지만 내 손에서 정성으로 만들어진 모자나 머풀러, 조끼나 스웨터 같은 소품들이 생명력을 얻고 사랑을 받을 때면 수고를 잊을 만큼 가슴 뿌듯하다.
오늘은 굳이 무엇을 만들 생각도 없는데 마음을 붙잡으려고 바구니를 뒤적인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제나 조용한 성품으로 사람들 뒷전에서 할 일을 찾아하던 영혼이 맑은 친구였다.
그녀는 식구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한다. 가족들이 황망해 하는 가운데 의사로부터 받은 진단은 뇌종양이었다.
얼마 후,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인 그녀를 볼수 있었다. 그동안 겪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몸은 많이 야위었고 긴 머리카락이 사라진 머리엔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애처가인 그녀의 남편은 예상치 못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이고, 지인들은 안타까워만 할 뿐 환자의 고통을 나눠 가질 수 없었다.
그날 밤, 뜨개질 바구니를 뒤적였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쾌유를 비는 염원을 담아 모자를 뜨는 일이었다. 마음이 심난하니 실이 잘 엉키었지만 끝까지 인내로 풀어내며 실처럼 길게 살아내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로 일년 여 동안 실내용과 외출용 등, 계절에 맞는 모자를 만들어 줄 때마다 그녀는 그저 살포시 웃어주었다. 그녀 가족은 미국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누구보다도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다.
내가 샤롯(charlotte)을 떠나 엘레이(LA)로 돌아오면서 그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먼저 세상 떠난 나의 막역지우(莫逆之友)와 삶의 결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와는 처녀때 만나 청춘의 열정기를 보내고 결혼, 임신, 아이들 교육에 따른 고민도 의논하며 남편 자랑이나 푸념도 거리낌 없이 주고 받던 혈육같은 사이였다.
그런 친구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무슨 운명인지 나도 십여 년 뒤 미국으로 건너 오게 되었고 친구와의 우정이 계속 되었다.
친구가 보여주는 신세계는 그리 밝지 않았다. 한국에서 대기업 직원으로 자존심 높았던 그녀는 만만치 않은 삶의 파도를 헤치며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
이민자들은 낯선 문화권에 들어서면 약자가 된다. 모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도 정착한 땅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해야 하고 인종간의 갈등 등, 헤쳐나가야 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나무도 옮겨심으면 몸살을 앓는다는데 사람이야 오죽하랴. 더불어 이민자들은 고향을 향한 마음의 목마름과 현실을 지탱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다. 이런 스트레스가 머릿속 핏줄도 알게 모르게 녹여내는 것인지 친구가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노모를 모시고 방문한 통증치료 병원에서 머리가 아프다 하더니 쓰러졌다고 했다.
장례식 전날 고인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뷰잉(Viewing) 예배가 있었다. 예식이 시작 되기 전 나는 그녀의 관 앞에 섰다. 뚜껑을 반 쯤 오픈한 관 속에 친구가 누워있었다.
“ㅇㅇ야! 어서 일어나.” 거짓말 같은 진실이 확인 되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장이 무너졌다.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만져봐도 친구는 차가운 촉감만을 전해줄 뿐 말이 없었다.
눈물로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다 보니 수의(壽衣)로는 어울리지 않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옷가게에서 손을 선뜻 뻗지 못하는 그녀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이렇게 빨리 떠나갈 것을 무얼 위해 그리 아등바등 살았을까,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불과 그녀 나이 오십대 중반이었다.
뜨개질 바구니를 정리한다. 색색실로 풍성하던 바구니속이 흐드러지게 피고 진 꽃자리처럼 허전하다. 꽃잎이 떨어지면 다음 해를 기다리면 되는데 사람이 떠난 자리는 다시 돌아올 기약 없어 추억으로 메운다.
“ 친구들아! 인생길 좋은 벗 되어주어 고마웠다. ”
나의 뜨개질 바구니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발효된 향기로 남아있다.
조옥규/수필가
오랜만에 뜨개질 바구니를 꺼낸다. 요즘은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도 뻣뻣해져 의식적으로 멀리 하지만 오랫동안 곁에 두고 희노애락을 짜내려 가던 소중한 실바구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지셨을 때 굵고 실한 실 꿈을 태몽으로 꾸었다 하셨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하다가도 예쁜 실이 눈에 띄면 사 모으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렇게 모았던 실이 손녀의 아기모자 보닛(bonnet)과 케이프(cape)가 되었고, 어느 젊은 부부의 아기 겉싸개가 되기도 했다.
나는 뜨개질 전문가도 아니고 솜씨도 어설프다. 하지만 내 손에서 정성으로 만들어진 모자나 머풀러, 조끼나 스웨터 같은 소품들이 생명력을 얻고 사랑을 받을 때면 수고를 잊을 만큼 가슴 뿌듯하다.
오늘은 굳이 무엇을 만들 생각도 없는데 마음을 붙잡으려고 바구니를 뒤적인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제나 조용한 성품으로 사람들 뒷전에서 할 일을 찾아하던 영혼이 맑은 친구였다.
그녀는 식구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한다. 가족들이 황망해 하는 가운데 의사로부터 받은 진단은 뇌종양이었다.
얼마 후,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인 그녀를 볼수 있었다. 그동안 겪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몸은 많이 야위었고 긴 머리카락이 사라진 머리엔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애처가인 그녀의 남편은 예상치 못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이고, 지인들은 안타까워만 할 뿐 환자의 고통을 나눠 가질 수 없었다.
그날 밤, 뜨개질 바구니를 뒤적였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쾌유를 비는 염원을 담아 모자를 뜨는 일이었다. 마음이 심난하니 실이 잘 엉키었지만 끝까지 인내로 풀어내며 실처럼 길게 살아내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로 일년 여 동안 실내용과 외출용 등, 계절에 맞는 모자를 만들어 줄 때마다 그녀는 그저 살포시 웃어주었다. 그녀 가족은 미국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누구보다도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다.
내가 샤롯(charlotte)을 떠나 엘레이(LA)로 돌아오면서 그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먼저 세상 떠난 나의 막역지우(莫逆之友)와 삶의 결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와는 처녀때 만나 청춘의 열정기를 보내고 결혼, 임신, 아이들 교육에 따른 고민도 의논하며 남편 자랑이나 푸념도 거리낌 없이 주고 받던 혈육같은 사이였다.
그런 친구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무슨 운명인지 나도 십여 년 뒤 미국으로 건너 오게 되었고 친구와의 우정이 계속 되었다.
친구가 보여주는 신세계는 그리 밝지 않았다. 한국에서 대기업 직원으로 자존심 높았던 그녀는 만만치 않은 삶의 파도를 헤치며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
이민자들은 낯선 문화권에 들어서면 약자가 된다. 모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도 정착한 땅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해야 하고 인종간의 갈등 등, 헤쳐나가야 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나무도 옮겨심으면 몸살을 앓는다는데 사람이야 오죽하랴. 더불어 이민자들은 고향을 향한 마음의 목마름과 현실을 지탱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다. 이런 스트레스가 머릿속 핏줄도 알게 모르게 녹여내는 것인지 친구가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노모를 모시고 방문한 통증치료 병원에서 머리가 아프다 하더니 쓰러졌다고 했다.
장례식 전날 고인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뷰잉(Viewing) 예배가 있었다. 예식이 시작 되기 전 나는 그녀의 관 앞에 섰다. 뚜껑을 반 쯤 오픈한 관 속에 친구가 누워있었다.
“ㅇㅇ야! 어서 일어나.” 거짓말 같은 진실이 확인 되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장이 무너졌다.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만져봐도 친구는 차가운 촉감만을 전해줄 뿐 말이 없었다.
눈물로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다 보니 수의(壽衣)로는 어울리지 않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옷가게에서 손을 선뜻 뻗지 못하는 그녀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이렇게 빨리 떠나갈 것을 무얼 위해 그리 아등바등 살았을까,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불과 그녀 나이 오십대 중반이었다.
뜨개질 바구니를 정리한다. 색색실로 풍성하던 바구니속이 흐드러지게 피고 진 꽃자리처럼 허전하다. 꽃잎이 떨어지면 다음 해를 기다리면 되는데 사람이 떠난 자리는 다시 돌아올 기약 없어 추억으로 메운다.
“ 친구들아! 인생길 좋은 벗 되어주어 고마웠다. ”
나의 뜨개질 바구니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발효된 향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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