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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한풍 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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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아
작성일 25-02-1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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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한풍 부는 날

조옥규/수필가

  서늘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보니 벽난로의 장작은 밤새 타버리고 시커먼 등걸만 남았다.
서둘러 장작에 불을 붙이며 창문 블라인더를 걷어 올리니 옹기종기 모여있는 오두막 지붕에 눈이 소복하다. 쭉 뻗은 소나무가 때 늦은 설한풍(雪寒風)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몸부림친다. 티 하나 없이 푸르던 어제의 쪽빛하늘은 어디로 갔을까.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안개비처럼 흩어진다.
순간, 이 날씨에 고도 5000 피트의 얼어버린 산길을 내려갈수 있을까? 눈이 녹을때까지 고립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걱정도 잠시, 자연에 승복하며 마음을 내려 놓으니 두려움 보다는 평안이 찾아든다.

 타 오르는 장작불이 아름답다. 이 나무는 어느날 조그만 솔나무 씨앗으로 땅에 떨어져 수십 년, 아니면 수 백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이며 키를 키우고, 날아드는 벌나비들 보듬다보니 품도 넓어졌을 것이다. 또한 긴 세월 자연의 질서를 맨몸으로 견디며 간직해야할 것과 버려야할 것의 혜안이 생기고 마음속엔 자신만의 향기를 눌러 채웠을 것이다.
 장작의 몸통과 결을 보니 나무의 생이 짧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짐작컨대 늠름한 기상으로 숲을 지키며 세상의 한 축을 감당 했을 것 같다. 지금은 무슨 연유로 땔감이 되어 마지막 순간을 나와 함께 하는지 애잔한 마음이 든다. 
“지나온 삶에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는 걸까. ” 눈바람 불어 꼼짝할 수 없는 오두막에 세월의 무상함이 한 자리 한다. 

 장작 타는 방안에서 설림(雪林)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일품이다. 눈이 며칠 더 내려서 세상의 번다(煩多)한 일상과 격리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저마다의 길로 집을 떠나니 부모의 어깨는 책임감으로부터 느슨해지고 마음은 허허로워졌다. 그래도 나이 들어 좋은 점이 있다면 살아온 연륜으로 삶의 속성을 알게되니 아주 좋아할 일도, 서운해 할 일도 없이 마음이 잔잔하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두 노인네 서로 등 긁어주며 소박한 여행이나 하면서 살려나 했었다. 인생 기어를(gear) 저속에 놓고 흘러가는 구름과 스치는 바람에게도 아는 체 하며 너그러운 자연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반겨할 수 없는 불청객이 남편에게 찾아들었다. 

  한 낮이 되니 햇살이 퍼진다. 지붕에 쌓인 눈이 빗물 되어 녹아 내린다. 흐르는 물은 또 다른 생명의 번식을 기약하며 솔방울의 심장을 적시고 있을 것이다. 
아침녁엔 아름드리 소나무가 두 팔을 휘저으며 요란하게 절규하기에 등치값도 못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바람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으며 나무는 바람의 본성을 존중하기에 고달픔을 무릅쓰고라도 품에 안아 달래는 듯 보인다.   
처음 그이의 발병 소식을 들었을 때 ‘왜 이 사람인가.’ 라는 의문표가 머릿속에 쉼없이 떠돌아 다녔다. 이 상황을 받아 드려야 하는 합리성을 찾기에 영혼이 지쳐갔다.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고 한다. 혹여 그이의 살아온 길이 너무 고단했기에 병마가 찾아든 것일까.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가슴이 저리다. 

  우리 부부는 현실과 타협하며 힘 닿는대로 짧은 여행을 다닌다. 생사의 결정권은 인간의 권한 밖이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매달려 오늘을 불행하게 보낼 것인지, 허락된 오늘을 최상으로 행복하게 보낼지는 스스로 정할 일이다. 
과거의 삶이 소중하고 부끄럽지 않으며 현재의 삶도 축복이라 여기니 내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한줌의 재로 사라지면서도 마지막까지 향기를 잃지 않는 장작의 심성을 닮고 싶다. 설한풍 부는 날, 자연에서 추억을 반추하며 현재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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