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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야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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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아
작성일 17-02-0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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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떠나야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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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 발행 2017/02/01?미주판?8면 ?? 기사입력 2017/01/31 23:23

이정아/수필가


아침 저녁으로 혈압약, 면역억제제, 스테로이드에 각종 비타민 등 한 움큼씩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식성이 좋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장기 이식 환자는 평생 먹어야 하는 약들이므로 내 식욕에 감사한다. 뭐든 잘 먹으니 약먹는 건 일도 아니지 뭔가.

한달에 적어도 두 번은 가야 하는 병원 출입. 이것도 감사하다. 투석할 땐 일주일에 세 번씩 가서 죽음의 문턱까지 왕래하다 곤죽이 되어오곤 했는데 한 달 두 번은 가볍지 않은가? 잠시 따끔한 피검사를 견디고 닥터의 조언을 착한 학생처럼 들으면 되니 예전에 비하면 마음 편한 병원 출입이다.

병원에 일찍 가서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많은 동지를 만난다. 투석 중인 이들을 보면서 예전 고통을 추억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이식수술 대기자들에겐 선험자인 내가 관심대상이어서 질문들이 많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하여 전전긍긍이다. 수술 전후의 주의할 점, 식생활과 운동 등 환자의 섭생에 대한 조언을 하며 속으로 놀란다. 무척이나 안 지켜서 주치의와 남편을 실망시킨 주제에 남을 가르치려 들다니. 그들의 불안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자꾸 떠들게 된다. 오래전 학교 선생을 했던 전과(?)가 드러난다.

병원 다녀오는 길엔 나도 모르게 착해진다. 만나는 이들에게 관대하게 된다. 누가 좀 무례하다 할지라도, 저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 남모를 아픔이 있겠지 한다. 교통법규를 안 지키는 차를 만나도, 저 사람도 가족 중 환자가 있을지 몰라 하며 너그러워진다. 연대감 같은 게 생겨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크게 아프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므로.

환자는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누구에게든 기대게 된다. 누군가에게 나를 맡기게 된다. 아프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하면 아파도 참고, 이제 다 끝났어요 하면 휴우 안도하고 미소짓게 된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와 인사하고 나오면 맑은 하늘이 참 좋다. 다음 검진까지 또 살 수 있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처럼 가벼운 마음이 된다. 나는 약솜처럼 포근하고 하얘진다.

집에 와선 환자 돌보느라 지친 남편에게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이거 해줘 저거 해줘 늘 보채다가도 이 날만큼은 남편이 좋아하는 삼겹살도 굽는다. 한 시간 부엌에서 서성거리면 체력이 바닥나, 두 시간은 누워 쉰 후에나 밥상을 마주할 기력이 될망정 잠시 유순한 마누라가 되어 보는 것이다.

사랑이 떠나면 사랑이 보인다. 부모가 떠나면 부모가 보인다. 소중한 것들은 떠나면 그 소중함이 보인다. 건강을 잃으면 뒤늦게 알게 된다. 얼마나 건강이 소중한 것인지.

병원 다녀온 날엔 모든 생명이 귀하고 감사하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하다. 목숨 지키려면 잘 먹고 운동해야지 전의가 솟는다. 약한 나를 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병원 가는 날, 내 삶에 있는 그 장치가 감사하다. 완벽하지 않고 결핍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질 않던가. 골골 100년 계속 가보자.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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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joongKim님의 댓글

HeejoongKim 작성일

네, 100년 가시리라 축복하고 기도 합니다.  병원이란 곳은 참 희한한데 같읍니다.  아무리 가도 정은 않들고, 멀리 하기도, 또 가까이 하기도 너무 먼 당신, ㅋㅋ  전 저번에 피한번  잘못뽑았다가 아직도 그팔에 "전기"를 느낍니다.  또뽑기 겁나지만, 그래도 뽑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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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님의 댓글

이정아 작성일

병원은 온도가 낮아서 싸한 공기를 느끼게됩니다.<br />
정신이 드는 서늘한 온도가 저는 좋습니다.<br />
100년에 미련을 두기보단 매일이 마지막날인듯<br />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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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님의 댓글

이정아 작성일

ㅎㅎ 골골 100년 <br />
옆에서 돕는 배우자는 죽을 맛이겠죠?<br />
하나님의 때에 주변에 폐주지 말고 가야죠.<br />
기도제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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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옥님의 댓글

윤선옥 작성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몸을 잘 간수하는 자녀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이 신앙심이 좋을 거라고 유추하지요.
작고한 사람들의 약력을 볼 때 얼마나 오래살았는 지의 생몰연대를 제일 먼저 체크한답니다.
골골 100년!! 아자 파이팅 입니다.

오랫만에 사이트에 오니 주옥같은 읽을거리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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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ie님의 댓글

Jeannie 작성일

그 어려운 시기를 믿음과 사랑으로 잘 견뎌내신 집사님만이 누리실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일거란 생각이 듭니다.. 가지고 있으나 그 소중함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하나하나를 꼽아보며 감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축복합니다! 늘~ 건강하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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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님의 댓글

이정아 작성일

돌아보면 교우들, 가족들, 친지들의 합심기도 중보기도 통성기도 <br />
덕에 살아나지요. 그 감사를 종종 잊고 삽니다.<br />
그 기도를 남을 위한 기도로 갚고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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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란님의 댓글

김세란 작성일

집사님과 작년에 미디어팀 모임에서 오랜 대화를 나눌적이 있었는데 무슨얘기든 재밌게 풀어내시는 집사님의 능력덕에 다들 어찌나 많이 웃었는지...지금까지도 그때의 유쾌함에 미소짓게 되네요^^ 약드시는것도 식욕에 감사한다 하시고 다른분들의 마음도 헤아리시고 고난도 힘듬도 다 유머로 감사로 이겨내시니 웃음은 정말 만병통치약일것 같습니다.그렇게 저희에게 웃음을 선물해 주시듯 많이 웃으시고 더는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게 골골 아니고 짱짱하게 100년!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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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님의 댓글

이정아 작성일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모두 우울해서<br />
제가 좀 웃기려고 노력 하는 편입니다 ㅎㅎ<br />
짱짱 100년 그거 좋은데요.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