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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축가/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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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아
작성일 25-11-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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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황당한 축가
중앙일보 Los Angeles | 2025.11.11.17:38

이정아/수필가

이맘때쯤 가을이면 자주 흥얼대는 노래가 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내가 아는 짧은 가곡이다. 가사에 가을도 들어가니 가을노래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대학동창의 약혼식에 참석한 내가 지목이 되어 갑자기 축가를 불러야 했다.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가볍지 않고 품위 있게 하려고 선곡한 게 가곡인 이 노래였다.

한껏 고상하게 보여 신랑친구들한테도 점수 좀 딸 절호의 찬스였는데, 노래 마치자 분위기가 썰렁했다. 가을 노래인 줄 알았던 이 노래가 박목월 작시 김성태 작곡의 ‘이별의 노래‘였던 거다. 축하의 자리에서 이별 노래로 초를 치다니.

실수를 크게 한 후 알아보니 이 시의 배경엔 6·25 전쟁 때 조국의 앞날을 노래했다는 설도 있고, 목월이 사랑한 제주에 두고 온 연인을 그리는 노래라는 설도 있는 사연 있는 이별가였던 거다. 그 이후 40년도 넘는 세월을 지나면서 축가를 불렀던 약혼식의 주인공들이 어찌 사는가 늘 마음을 졸였다. 만일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 노래 탓이려니 노심초사했다.

한국 살던 그 친구가 남편의 연수로 미국에 들어와 눌러살게 되면서 멀지 않은 거리에 살아서 소식을 잘 듣고 있다. 자손들이 잘되고 잘 풀린다니 얼마나 다행한가. 그녀가 잘 살고 있는 게 내일처럼 고맙다. 노래의 저주에서 풀린 듯 마음이 이젠 편하다.

내 나이 가을이 되니 오래된 기억이 낙엽과 함께 아스라이 묻혀져간다. 늦가을이어도 낙엽을 잘 볼 수 없는 이곳에 살지만 마당 한 귀퉁이의 대추나무도 노란 단풍이 들고 감나무는 감색으로 이파리가 물들었다. 연못의 연잎도 금빛으로 변한다는 걸 알았다. 여물어가는 것들은 제 색을 버리고 덜어내면서 다 선한 빛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중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덜어냄이나 버림의 미덕을 마음 깊이 새기고 난 잘 여물었는가. 잘 여물어 이웃과 나눌 선한 열매가 있는가.

마침 읽은  이호준시인의 시 “11월”에서 답을 찾아본다.

“괜히 11월일까
마음 가난한 사람들끼리
따뜻한 눈빛 나누라고
언덕 오를 때 끌고 밀어주라고
서로 안아 심장 데우라고
같은 곳 바라보며 웃으라고
끝내 사랑하라고
당신과 나 똑같은 키로
11
나란히 세워놓은 게지”

감사의 계절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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