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잊은 꽃처럼/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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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아
작성일 25-11-10 20:35
작성일 25-11-10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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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잊은 꽃처럼 / 김윤희
이민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서른 해를 넘겼다. 낯설고 어색한 것들에 하나둘 부딪치며 적응해 오는 동안 이 땅은 우리 가족의 삶과 꿈을 함께 키워 온 무대가 되었고 토렌스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우리 동네는 가까이 드넓은 태평양이 있어 여름이면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고, 겨울에도 푸른 잔디와 이름 모를 꽃들이 사철 피어난다. 그럼에도 계절마다 달라지는 고국의 사계절은 문득문득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계절은 늘 시처럼 흘러갔다. 봄이면 노란 개나리 사이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연분홍 진달래가 언덕을 수놓았다.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대지를 감싸고, 해를 닮은 해바라기는 하늘을 향해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머무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황금빛 들판은 바람 따라 넘실거리고 산들은 단풍빛으로 천천히 물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는 가녀린 몸짓으로 계절의 노래를 이어 간다.
나는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여고 시절, 모교 운동장 맞은편의 넓은 공터는 입학 때부터 상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비워져 있었다. 1학년 가을, 바람이 가져온 선물인지 누군가의 손길이 스쳐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곳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해마다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며 꽃밭은 점점 넓어졌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한들한들 꽃물결은 어느새 계절이 마련한 소박한 축제장이 되어 있었다.
공터에서 이어진 대로변에는 이삼백 미터쯤 코스모스 길이 펼쳐졌다. 토요일 하굣길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지 않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걷던 풍경은 아직도 내 안에서 반짝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은 손짓하듯 우리를 반겼고,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처럼 들뜬 마음으로 그 속을 뛰놀았다.
재작년, 친구 집들이에 가던 길, 한 정원의 코스모스가 시선을 끌었다. 미국에서 처음 마주한 꽃이 반가워 차를 멈추고 살펴보니 틀림없는 코스모스였다. 친구는 원산지가 멕시코라며 히스패닉 동료에게 모종을 부탁해 주겠다고 했다.
이듬해 여름, 촉촉히 비가 내리던 날 친구는 코스모스 모종 다섯 포기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비 오는 날 심으면 더 잘 자란다며 창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단에 정성껏 심어 주었다. 여름에 코스모스라니 반신반의했지만, 몽우리가 맺히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연분홍, 진분홍 꽃망울이 차례로 피어났다. 한 송이가 지면 다른 가지에서 또 피어났고, 떨어진 씨앗은 새로운 싹을 틔웠다. 한국에서는 가을에만 보던 꽃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계절을 잊은 듯, 마치 나를 기억한다는 듯 피어올랐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다 문득,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뒤 소식이 끊겼던 친구 J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 추억 속에만 머물던 친구를 이번에는 꼭 찾고 싶었다. 마침 교인 중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장로님이 계셨고, 우연처럼 J의 부모님과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인연이 다리가 되어 마침내 J와 연락이 닿았고, 그렇게 이어진 카톡 대화는 밤이 깊도록 멈추지 않았다. 잊힌 줄만 알았던 시간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코스모스처럼 다시 피어났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끊어진 줄 알았던 우정은 극적으로 이어졌고 내 안에 묻혀 있던 그리움도 어느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우정이란 어쩌면 계절을 잊은 코스모스처럼 때를 기다리다 어느 날 불현듯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줄만 알았던 순간들, 잊힌 듯 스쳐간 친구들 역시 마음 한켠에 머물며 언젠가 다시 피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This member, remember. Forever.”
학창시절 우리가 늘 외치던 구호처럼
우리의 우정과 소중했던 순간들도 계절을 잊은 꽃처럼 다시 피어나리라.
이민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서른 해를 넘겼다. 낯설고 어색한 것들에 하나둘 부딪치며 적응해 오는 동안 이 땅은 우리 가족의 삶과 꿈을 함께 키워 온 무대가 되었고 토렌스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우리 동네는 가까이 드넓은 태평양이 있어 여름이면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고, 겨울에도 푸른 잔디와 이름 모를 꽃들이 사철 피어난다. 그럼에도 계절마다 달라지는 고국의 사계절은 문득문득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계절은 늘 시처럼 흘러갔다. 봄이면 노란 개나리 사이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연분홍 진달래가 언덕을 수놓았다.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대지를 감싸고, 해를 닮은 해바라기는 하늘을 향해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머무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황금빛 들판은 바람 따라 넘실거리고 산들은 단풍빛으로 천천히 물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는 가녀린 몸짓으로 계절의 노래를 이어 간다.
나는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여고 시절, 모교 운동장 맞은편의 넓은 공터는 입학 때부터 상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비워져 있었다. 1학년 가을, 바람이 가져온 선물인지 누군가의 손길이 스쳐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곳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해마다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며 꽃밭은 점점 넓어졌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한들한들 꽃물결은 어느새 계절이 마련한 소박한 축제장이 되어 있었다.
공터에서 이어진 대로변에는 이삼백 미터쯤 코스모스 길이 펼쳐졌다. 토요일 하굣길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지 않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걷던 풍경은 아직도 내 안에서 반짝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은 손짓하듯 우리를 반겼고,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처럼 들뜬 마음으로 그 속을 뛰놀았다.
재작년, 친구 집들이에 가던 길, 한 정원의 코스모스가 시선을 끌었다. 미국에서 처음 마주한 꽃이 반가워 차를 멈추고 살펴보니 틀림없는 코스모스였다. 친구는 원산지가 멕시코라며 히스패닉 동료에게 모종을 부탁해 주겠다고 했다.
이듬해 여름, 촉촉히 비가 내리던 날 친구는 코스모스 모종 다섯 포기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비 오는 날 심으면 더 잘 자란다며 창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단에 정성껏 심어 주었다. 여름에 코스모스라니 반신반의했지만, 몽우리가 맺히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연분홍, 진분홍 꽃망울이 차례로 피어났다. 한 송이가 지면 다른 가지에서 또 피어났고, 떨어진 씨앗은 새로운 싹을 틔웠다. 한국에서는 가을에만 보던 꽃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계절을 잊은 듯, 마치 나를 기억한다는 듯 피어올랐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다 문득,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뒤 소식이 끊겼던 친구 J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 추억 속에만 머물던 친구를 이번에는 꼭 찾고 싶었다. 마침 교인 중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장로님이 계셨고, 우연처럼 J의 부모님과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인연이 다리가 되어 마침내 J와 연락이 닿았고, 그렇게 이어진 카톡 대화는 밤이 깊도록 멈추지 않았다. 잊힌 줄만 알았던 시간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코스모스처럼 다시 피어났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끊어진 줄 알았던 우정은 극적으로 이어졌고 내 안에 묻혀 있던 그리움도 어느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우정이란 어쩌면 계절을 잊은 코스모스처럼 때를 기다리다 어느 날 불현듯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줄만 알았던 순간들, 잊힌 듯 스쳐간 친구들 역시 마음 한켠에 머물며 언젠가 다시 피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This member, remember. Forever.”
학창시절 우리가 늘 외치던 구호처럼
우리의 우정과 소중했던 순간들도 계절을 잊은 꽃처럼 다시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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